<나랏말싸미>는 왜 실패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세종대왕 대신 이름 모를 스님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라서 망했다. 끝이다.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지만 생각해볼 여지를 만들어보려 한다.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세종대왕은 성역인가. 그렇다.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같은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세종대왕 위인전은 ‘신화’와 다름 없어 보인다.  <나랏말싸미>는 예술영화가 아니고 대중에게 소구해야 하는 여름 극장시장의 상업영화다. 조철현 감독이 근거 없는 상상으로 <나랏말싸미>의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사료를 검토한 뒤에 신미(박해일)라는 스님이 한글 창제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가 불자인지 아닌지는 논외다. 역사는 분명 해석의 여지가 있는 영역이며 학자가 아니라도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이를 근거로 가설을 만들 수 있다. 이준익 감독과 여러 영화를 만들고 <사도>의 각본을 쓰기도 했던 ‘이야기 장사꾼’인 조철현 감독은 이 새로운 접근에 현혹됐다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라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면서 대중이 세종대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나랏말싸미>를 통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한국에서 절대 건들이지 말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 동상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국뽕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명량>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겠다. 과연 대중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아마도 대중은 내가 알고 있던 위대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큰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을 것 같다. <뿌리 깊은 나무> 같은 드라마의 극장판을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나랏말싸미>는 그 기대를 배신했다. 이는 영화의 홍보 과정의 패착일 수도 있다. 좀더 적극적으로 신미 스님에 대한 부분을 노출했어야 한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관객들이 <나랏말싸미>가 신미 스님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가설을 역설하는 영화라는 정보를 알고 가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개봉 전부터 큰 논란에 휩싸였겠지만 적어도 기대를 배신하는 영화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란의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것과 기대를 배신한 영화 가운데 더 낮은 평가를 받는 건 후자라고 생각한다.

개봉전 논란이 될 영화 <나랏말싸미>를 가정하고 보니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나랏말싸미>를 신성 모독 논란의 댄 브라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다빈치 코드>처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냥 상상을 해보자. <훈민정음 해례본>을 둘러싼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한 국문학자가 등장해 그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알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 관두도록 하자. 의미가 없어 보인다.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의 신화는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공고하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는 영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스님이 됐든 집현전 학자가 됐든, 이름 모를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이야기도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상관없다.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깊게 관여했다는 가설을 진지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창작물에는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단, 논란을 가져올지도 모를 이야기를 대중에게 할 때는 설득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나랏말싸미>처럼 실패하고 만다. 

결국 영화는 영화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나랏말싸미>는 영화적으로 재미가 없었나. 내가 보기엔 그럭저럭 볼 만했다. 미술이나 촬영에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고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간혹 유머러스한 장면에선 피식 웃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신하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세종(송강호)의 갈등도 그럴싸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 가운데 소헌왕후(전미선)라는 인물을 넣은 것도 비난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보는 건 영화비평가들의 몫일 테다. 세종과 한글창제의 비밀이라는 소재만 아니었다면 조철현 감독의 데뷔작은 실패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덧. <나랏말싸미>의 공동 각본가인 이송원 작가의 <씨네21>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하려 한다.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던 세종대왕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3년 전 겨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시위를 지켜보면서다.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모습을 보고 진짜 21세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수십만 촛불에 에워싸인 세종대왕 동상을 올려다보면서 이제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다 싶었다”는 게 이 작가의 회상이다.  

그러니까 조철현 감독과 이송원 작가는 한글 창제에는 관심 없는 사대부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과 세종대왕과 신미, 소헌왕후가 대변하는 백성의 대결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구도에서 신미가 없었다면,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나랏말싸미>는 성공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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