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많아졌다. 늙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 속의 별 것 아닌 장면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최근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재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첫 시퀀스를 보고 눈물을 쏟을 뻔했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첫 시퀀스는 그야말로 평화롭기 그지 없는 장면이다. 지브리의 익숙한 토토로 로고가 사라지면 처음엔 바다인줄 알았던 넓은 호수를 바라보는 푸른 풀밭 언덕에 누워 있는 어린 마녀 키키가 등장한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키키의 머리칼도 풀과 함께 흔들린다. 벌 한 마리가 시끄럽게 웽웽 거리고 키키의 머리맡에 있는 휴대용 라디오에서 날씨 소식이 흘러나온다. 정정. 라디오 소리가 먼저 들리고 카메라가 패닝(panning)하며 키키를 보여주는 것 같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찾아보기는 귀찮다. 라디오 속 딱딱한 말투의 남자는 “오늘 밤에는 근사한 보름달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이어서 “내일도 맑겠습니다. 모레도 맑겠습니다”라고 덧붙인다. ‘내일도 맑고, 모레도 맑겠다’는 말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키키는 두 팔을 머리에 괴고 누워서 눈을 껌뻑껌뻑 거린다. 바람은 여전히 살랑거린다. 벌의 웽웽 거림이 사라지면서 멀리서 들려오던 히사이시 조의 음악 ‘맑은 날에’(晴れた日に)가 오버랩(overlap)되며 불륨을 키운다. 음악 소리가 커질 때 조금씩 감정이 벅차올랐다. 키키의 무표정한 얼굴이 화면을 채울 때 눈물을 참아야 했다. 무표정이 아니라 사실은 오늘밤, 마녀 수행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나겠다고 다짐하는 키키의 표정과 아련한 분위기를 담아낸 음악의 조화, 손으로 그린 그림이기에 어쩌면 더 실제 같은 지브리 스타일의 바람 표현과 스테레오가 아닌 조악한 라디오 소리의 어울림이 마음에 파고들어온 것 같다. 굳이 벌을 등장시키는 건 어떤 이유였을까. 알 수 없지만 벌도 이 시퀀스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중요 요소처럼 느껴진다. 키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래전 이 애니메이션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문득 생각이 난 거다. ‘그래, 키키는 가족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가야 하는 거였지.’ 라디오의 남자가 날씨 정보를 다 말하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시장의 물품 시세 정보를 나열하려던 찰나, 키키는 라디오를 끄고 벌떡 일어난다. 여기까지가 첫 시퀀스인 것 같다.

다음 시퀀스에서 키키는 씩씩한 소녀의 모습이 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첫 시퀀스에서와는 정조(情調)가 다르다. 지브리의 모든 캐릭터가 그렇듯이 육상 선수처럼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동작으로 집으로 달려가는 키키는 동네 어르신을 만나 잠깐 멈춘 뒤 예의 바르게 무릎을 까딱하며 인사하고 집으로 다시 달린다. 벌컥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키키. 이웃 할머니에게 줄 류마티스 관절염 약을 만들던 엄마에게 당찬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출발할 거예요.”

예전에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 땐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아련한 마음이 들었던가. 알 수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략 10년 전에 <마녀 배달부 키키>를 처음 봤던 것 같다.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선배의 자녀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며 이 애니메이션을 추천했던 기억이 또렸하다. 그 아이는 지금 성인에 가까워졌을 텐데 <마녀 배달부 키키>를 봤는지 모르겠다.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 뻘짓만 하다가 그 뻘짓마저 지겨워져서 뻘글을 남기게 됐다. 참 일하기 싫은 목요일이다. 내일도 일하기 싫고, 모레도 일하기 싫을 것 같다. 오늘밤 서울에는 어떤 달이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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